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🧑🦱 인물 개요
- 출생: 1900년 8월 10일, 대한제국 한성부 용산(현재 서울특별시 용산구)
- 사망: 1932년 10월 10일, 일본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 집행
- 소속: 한인애국단 (김구가 조직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)
- 의거일: 1932년 1월 8일, 도쿄 히비야 공원 앞
- 의거 목표: 일본 천황 히로히토(쇼와 천황) 암살
🧭 생애 및 독립운동 참여
1. 어린 시절과 청년기
- 이봉창은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성장하였으며, 일찍이 고아가 되어 노동과 유랑을 거듭했습니다.
- 1920년대 중반,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생활하며 생계를 유지했고,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회의감을 품고 있었습니다.
- 일본 내에서 한국인 차별을 직접 경험하면서 민족의식이 강해졌습니다.
2. 상하이로 건너감
-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 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힘.
- 김구는 처음엔 그의 일본식 말투와 외모로 인해 신뢰하지 않았지만, 이후 그의 진심과 결의를 확인하고 한인애국단에 가입시킵니다.
💣 이봉창 의거 (1932년 1월 8일)
✔️ 배경
- 김구는 국제 사회의 이목을 끌기 위해 일본의 심장부에서 상징적인 의거를 계획했고, 이봉창이 이를 자원했습니다.
- 이봉창은 가짜 일본 이름(다나카)을 사용해 도쿄에 잠입했습니다.
✔️ 의거 내용
- 1932년 1월 8일, 도쿄 히비야 공원 앞에서 일본 천황이 타고 있던 마차 행렬을 향해 폭탄을 투척.
- 천황이 타고 있던 마차를 정확히 식별하지 못한 탓에 실제 폭탄은 다른 마차(기마병대 호위대)를 명중시켰고, 천황은 무사했습니다.
- 현장에서 체포된 이봉창은 강도 높은 고문과 심문을 받았으며,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.
⚖️ 재판 및 순국
- 일본 제국 법원은 이봉창에게 **대역죄(천황 암살 시도)**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.
- 1932년 10월 10일,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습니다. 향년 32세.
🕊️ 의의 및 평가
- 이봉창 의거는 일제 내부에서 일본 천황을 직접 공격한 최초의 사건으로, 일본뿐 아니라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.
- **김구는 이 사건을 "조선의 광복의 불씨"**라며 높이 평가했습니다.
- 이 의거 이후 **윤봉길의 홍커우 공원 의거(1932년 4월)**가 이어지며,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감이 국제적으로 부각되었습니다.
- 대한민국 정부는 이봉창에게 **건국훈장 대통령장(추서)**을 수여했습니다.
📜 유산
- 묘소: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 (이봉창, 윤봉길, 백정기 세 의사의 유해가 이곳에 모셔짐)
- 기념사업: 대한민국은 매년 이봉창 의사를 기리는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, 교과서에도 주요 독립운동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.



📘 참고 어록
"나는 일본 왕을 죽이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. 내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."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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