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📌 1. 배경



① 광해군의 집권 배경
-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, 임진왜란 중에 세자에 책봉되어 전란 속에서 국정을 운영함.
- 전란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외교, 내정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지만, 정통성 부족과 강경한 왕권 강화 정책으로 인해 정치적 반발을 샀음.
② 광해군의 정치적 실책 (비판받은 점들)
- 형제 제거: 적통자인 영창대군(인목대비 소생)을 죽이고, **폐모살제(廢母殺弟)**라는 비난을 받음.
- 인목대비 폐위: 왕비였던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서궁(西宮)에 유폐함.
- 중립 외교 정책: 명(明)과 후금(청나라의 전신)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펼쳤으나, 명분을 중시하던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을 삼.
- 북인 중심의 정권 운영: 북인 세력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며, 남인·서인 등 다른 세력을 배제함.
📌 2. 인조반정의 전개
주도 세력
- 서인(西人) 중심의 반정 세력이 주도.
- 주요 인물: 이귀, 김류, 신경진, 정홍익, 최명길 등.
- 이들은 광해군의 폭정과 부도덕한 행위를 명분으로 내세움.
반정의 과정
- 1623년 3월 13일, 반정 세력은 **서울(한양)**에서 무력으로 거사를 일으킴.
- 광해군의 측근들이 대부분 전쟁 준비나 외곽에 있었고, 정권 기반도 약화되어 있어 큰 저항 없이 성공.
-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원도 강화도로 유배됨.
📌 3. 결과
정치적 변화
- 인조 즉위: 능양군 이종이 조선 제16대 왕 인조로 즉위.
- 북인 정권 붕괴, 서인 정권 수립: 정치 세력의 중심이 북인에서 서인으로 바뀜.
- 명분론 강화: 유교적 명분을 중시하는 정치 분위기가 강화됨.
외교 정책 변화
- 친명배금 정책 채택: 명나라에 더 밀착하고 후금(청)을 적대시함.
- → 이는 후일 정묘호란(1627), **병자호란(1636)**으로 이어지는 계기 제공.
📌 4. 역사적 의의와 평가
긍정적 시각
- 광해군의 전제적 통치를 막고 유교적 명분 정치를 회복했다는 평가.
- 부도덕한 정치를 타파한 "반정(反正)"으로 이름붙여짐 (즉, ‘바른 정치를 회복함’이라는 뜻).
부정적 시각
- 실용적 외교 정책(광해군의 중립 외교)을 배척하고 명분만을 중시한 결과, 국력을 약화시키고 외침을 자초.
- 이후 조선은 두 차례의 **호란(정묘호란, 병자호란)**을 겪으며 국력과 자존심 모두 큰 타격을 입음.
📌 5. 광해군 이후의 삶
- 광해군은 폐위 후 강화도로 유배되었고, 이후 제주도로 옮겨짐.
- 1641년 제주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함.
- 조선 후기 이후에는 광해군의 정책과 실용성을 재조명하는 움직임도 있음.



📚 참고 키워드
- 폐모살제(廢母殺弟): 어머니(인목대비)를 폐위하고 동생(영창대군)을 죽였다는 비난.
- 중립 외교 vs. 친명배금: 광해군의 외교정책과 인조 정권의 정책 차이.
- 정묘호란(1627), 병자호란(1636): 인조 정권의 외교 정책 결과로 발생한 후금(청나라)의 침입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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