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🔹 임오군란(壬午軍亂)의 배경과 원인



1. 군제 개편과 구식 군인 차별
-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신식 군대 창설: 1881년 고종은 일본의 영향을 받아 군제 개편을 시도하며, 일본식 군사 훈련을 받은 **별기군(別技軍)**이라는 근대식 군대를 창설했습니다.
- 구식 군대의 푸대접: 이와 동시에 전통적인 무관 중심의 구식 군대(5군영 출신 병사들)는 급료가 수개월 동안 체불되었고, 군복이나 무기, 훈련 등에서도 차별을 받았습니다.
- 특히, 임오군란 직전에는 13개월치 밀린 급료를 썩은 쌀과 모래가 섞인 음식으로 지급하여 병사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.
2. 외세의 개입과 백성들의 불만
- 일본과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면서 백성들 사이에서도 외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.
- 특히 일본의 내정 개입과 일본인 고문(顧問)들의 활동이 반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.
🔹 임오군란의 전개
- 1882년 7월 23일, 구식 군인들이 마침내 봉기합니다.
- 분노한 군인들은 훈련대 창설에 관여한 민씨 정권과 일본 고문들을 습격하였습니다.
- 궁궐 침입 및 일본 공사관 습격:
- 구식 군인들과 서울의 민중들은 궁궐을 습격하고 고종을 위협했습니다.
-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고, 일본인 교관과 관리들이 공격당했으며,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야키는 가까스로 탈출했습니다.
- 민씨 정권 인물 숙청 시도:
- 특히 고종의 장인인 민승호, 외척 세력들이 주요 표적이 되었습니다.
- 반면, 흥선대원군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고, 병사들도 그를 추대했습니다.
🔹 임오군란의 결과
1. 흥선대원군의 일시적 재집권
- 군란 직후 병사들과 백성들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시켰습니다.
- 그는 개화 정책을 중단하고 강경한 보수적 정책을 재추진했지만, 짧은 기간만 권력을 행사했습니다.
2. 청나라의 무력 개입
- 조선 정부는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고, 청나라가 병력을 보내 군란을 진압했습니다.
- 이후 흥선대원군은 청에 의해 강제로 납치되어 톈진(天津)으로 끌려갔고, 조선은 다시 민씨 정권 중심의 친청 정권으로 돌아갔습니다.
3. 청나라의 내정 간섭 심화
- 청은 군란 진압 이후 조선에 군대를 상주시키고, 내정에 직접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.
- **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(1882)**을 체결하여 청 상인들의 조선 내 무역 활동이 자유로워졌습니다.
4. 일본과의 외교 마찰
- 일본은 자국민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고, **제물포 조약(1882)**을 체결하여 배상금을 받고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켰습니다.
🔹 임오군란의 의의와 영향
- 조선 사회 내부의 군제 개혁의 한계와 사회적 불만을 폭발시킨 사건.
- 외세 간섭이 본격화되는 계기를 제공하며, 이후 갑신정변(1884), 동학농민운동(1894) 등 근대적 정치변동의 단초가 되었습니다.
- 조선이 더 이상 자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 없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기도 합니다.



🔹 요약
항목내용
발생 시기 | 1882년 7월 |
주체 | 구식 군인과 민중 |
원인 | 급료 체불, 차별, 외세 간섭 |
결과 | 청의 개입, 흥선대원군 납치, 일본과 조약 체결 |
의의 | 외세 간섭 본격화, 조선 정치 불안의 시작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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